친구를 만나러 다른 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지하철 역사를 걷고 있었다. 생각없이 걷는데, 비교적 긴 에스컬레이터 앞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퇴근 무렵이라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붐비는 곳이었는데,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열중을 하고 계시는 모습에 자연스레 나의 시선은 그 분을 향하게 되었다.

점잖게 차려입으시고, 배낭이 하나 있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서울 분은 아닌 듯 하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듯 했다. 그분이 하는 것을 유심히 봤더니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거시는 중이었다. 그것이 저렇게 앉아서까지 해야되는 일인가 싶기도 하였지만, 그 분은 자못 진지한 표정이셨다. 전화를 거는 것이야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겠으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할아버지의 오른손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전화번호 수첩이었다.

글씨를 얼마나 크게 써넣으셨던지, 순식간에도 내용들을 볼 수 있었다. 붓펜으로 쓴듯한 글씨체에 가지런하게 전화번호들이 틈도없이 적혀있었다. 할아버지는 전화번호부에서 전화를 보시고, 다른 한손으로는 핸드폰의 번호를 누르시고 계시는 것이었다.

요즘 핸드폰들은 참 좋다.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번호도 터치 식으로 바뀐지 오래다. 전화번호부에 기본적으로 1,2천개는 가뿐히 저장할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과연 그런 기술들이 그 할아버지의 ‘전화걸기’라는 목적을 달성 시켜드릴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에게 전화란, 전화번호를 누르고 전화가 걸리면 그 만인 기계였던 것이다. 전화번호부가 있지만, 아마도 그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전화번호를 따로 수첩에 적어놓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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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렇게 될까?


사람들의 지식이 높아지고, 문명이 발달하고 기계가 발달하지만, 아직도 모든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준의 기술은 멀게만 보인다. 아마도 핸드폰에 사진이라도 저장되어 있었다면 전화를 좀 더 쉽게 거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 전화기야 번호에 따라서 사진 저장도 가능하지만, 그분이 그 기능을 이용할리는 만무하다. 진짜 자연스러운 기술이 되려면 이런식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딸래미 전화번호가 몇번이드라..’ 이런식의 문장을 핸드폰이 인식해서, 사진과 함께 전화가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이 바로 그분에게 맞는 기술이 아닐까 싶다.

모든 기술발달이 인간의 행위를 돕는데서 출발하였겠지만, 요즘은 특히 좀더 인간화 되는 기술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다. 혼자 알아서 방바닦을 청소하는 청소로봇이라던지, 스스로 사람처럼 걸어다니는 로봇이라던지. 사람의 모든 생각을 읽어 처리하는 로봇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편히 전화를 걸 수 있는 그런 핸드폰이 한번 나오길 기대해본다.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과, 작은 수첩으로 온갖 공상을 해보는 지루하지만은 않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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